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부교 사건 (문단 편집) === 결론 === 만부교 사건은 그 당시 기준으로도 꽤나 극단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외교적 결례였음은 분명하지만 당시 고려 조정에게는 그렇게 해야 했던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만부교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왕건의 통치기와 후대 왕조들이 처했던 상황은 상당히 달랐기 때문. 그 탓에 후대의 시각으로만 바라봐서는 해당 사건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왕건을 필두로 한 고려 조정이 해당 사건을 일으킨 뒷배경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추측된다. 첫 번째는 고려 초기에 받아들인 수많은 발해 유민들의 반 거란의식을 고취시켜 그들을 포섭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발해 멸망 이후 수많은 발해 유민들이 고려에 귀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규모 역시 제법 큰 데 최소 수 만명에서 최대 수 십만명까지 추산될 정도로 엄청났고 그 중에는 발해의 왕족, 귀족, 고위무사와 같은 고위 계층도 상당수 있었다. 즉, 고려 입장에서는 국력을 급격히 불릴 수 있을 정도의 양질적으로 엄청난 인적 자원이 내부로 유입되어 왔으니 이 인구를 확실히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왕건은 개성 일대, 즉 상대적으로 발해와 가까운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다. 발해 유민들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한반도 남쪽까진 안 갈테고 그리고 기존의 신라는 너무 남쪽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즉 왕건 입장에서는 발해 유민이란 자기 지역 인근을 발전시킬 좋은 기회다. 이는 당시의 고려는 중앙집권제 국가라기보다는 봉건제에 가까운 국가로 보면 이해가 쉽다.] 고려는 발해 유민들을 고려 사람으로 인정하고 특히 그 지배층을 우대해줬다. 발해 역시 고구려계 후손들이 주축이 되어 세운 만큼 고려와 동질성이 제법 깊어 고려는 발해 유민들을 빠르게 동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왕족이나 고위무사 계층은 고려에서도 왕건이 직접 이들에게 호족에 준하는 귀족 작위를 내려줄 정도로 우대받았다. 그런데 그런 대우와는 별개로 고려 조정에서 만지작거릴 수 있는 카드는 발해 유민들의 반거란의식을 이용해 거란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발해 유민들은 당연히 조국을 멸망시킨 거란족에 맹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 차원에서 거란에 대한 적대 노선을 걷는다면, 발해 유민들의 원한을 달래주는 동시에 자연스레 고려와 발해 유민들 사이에 동질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고려 조정의 계산이었다. 만부교 사건은 발해유민들을 확실히 고려인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벌어진 외교적 퍼포먼스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당시 국제정세 상 고려 스스로도 거란과 적대할 이유가 매우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하며 북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고려는 그 정체성부터 창업군주인 왕건을 포함한 건국 세력부터가 패서 지역의 고구려 유민의 후손들 출신으로서, 요동 및 고구려의 옛 영토들을 회복해 고구려의 복원을 꿈구는 고토 회복 의식의 정신적 유산을 대대로 공유하고 있었으며, 개국 이념의 전면에도 서경 확보라는 정통성을 내세웠다. 이들은 당연히 명분만을 따지던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요동을 비롯한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에 해당 지역을 점유하던 것은 거란족의 요나라였으므로 엄밀히 말해 당시 고려는 거란과 영토 분쟁 상황에 놓여 있던 것이다. 고구려 고토 회복을 위해서는 언젠가 외교적으로든 군사적으로든 고려와 요나라가 충돌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이는 잠재적 적국이나 다름없던 거란에 대한 고려의 적대감을 고조시키는 요인이었다. 결국 거란이 침공할 때의 명분으로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는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은 절대 아니었다. [[고려-거란 전쟁]]은 이 사건으로부터 50년이나 뒤에나 일어난 것이기 때문. 차라리 이는 거란이 어디까지나 고려를 침공하기 위한 억지에 가깝게 내세운 명분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거란만이 아니라 몽골이나 후금도 중원을 공격하기 이전에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예방전쟁]] 격으로 후에 [[여몽전쟁]]이나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을 일으켜 한반도로 쳐들어온 사례가 있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북방의 기마민족이 대륙 침공 이전에 예방 전쟁을 위해 한반도를 먼저 공격하는 것은 상례였다. 그러므로 이 사건이 없었다 하더라도 거란의 침공은 불가피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대륙의 분열기에는 한반도 통일 왕조가 충분히 북진해 패권국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중국에 통일 국가가 자리잡고, 군사적인 부분에서만은 그 통일 중국도 능가하는 유목국가 또한 탄생하며 고려의 정책이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만부교 사건의 의의도 바뀌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